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0년 전쟁 (문단 편집) == 제1.5차: 팔츠 수복전 ([[1621년]] ~ [[1623년]]) == 보헤미아를 회복한 페르디난트 2세는 "팔츠를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고민에 빠졌다. 바이에른 공작 막시밀리안 1세에게 지원을 받을 때 해줬던 약속이 팔츠 [[선제후]] 자리를 준다는 것이었다.[* <[[금인칙서#s-2.8|1356년의 금인칙서]]>로 선제후 직위를 박탈당한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은 오랫동안 선제후 직위를 열망하였다. 30년 전쟁이 발발하기 전, 쾰른 전쟁에 개입하여 [[쾰른 선제후국|쾰른 선제후]]직을 숙질 계승으로 반세습화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런데 선제후라는 직위는 황제가 쉽사리 누구에게 주고 빼앗고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선제후를 교체한 황제는 14세기의 [[카를 4세]], 15세기의 [[지기스문트]]와 16세기의 카를 5세뿐이었다. 카를 4세는 <금인칙서>를 제정한 본인이었고, [[룩셈부르크 왕조]]의 순조로운 제위 계승을 위하여 바이에른 비텔스바흐 가문이 가지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협박으로 가져와 맏아들 [[바츨라프 4세|벤첼]]에게 수여하였다. 카를 4세의 차남 지기스문트는 후사가 없던지라 자신이 가지고 있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독일왕]] 선출에 도움을 주었던 [[호엔촐레른 가문]]의 [[뉘른베르크]] 성주 프리드리히 6세에게, 아스카니아 가문의 작센비텐베르크 가계가 절손된 작센비텐베르크 공국은 [[베틴 가문]]의 마이센 변경백 프리드리히 4세에게 주었다. 카를 5세는 슈말칼덴 전쟁으로 작센 선제후직을 갈아 치웠으나 자신에게 반항했던 베틴 가문의 직계인 에른스트계에서 자신에게 충성한 방계인 알브레히트계로 교체하는 것으로 그쳤다. 셋 다 선제후를 교체했을 뿐, 선제후 직위 자체를 박탈하거나 바꾸지는 않았다.] 먼저 다른 선제후들의 반발이 거셌고, 잉글랜드와 에스파냐에서도 [[프리드리히 5세]]를 폐위시키는 대신 그의 아들을 즉위시키는 것을 제의해왔다. 하지만 막시밀리안 1세에게 이미 약속을 했던[* 그렇지 않아도 페르디난트 2세와 막시밀리안 1세는 청년 시절 잉골슈타트 대학교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페르디난트 2세는 [[교황]]의 지원을 얻어 막시밀리안 1세를 팔츠 선제후로 책봉하였다. 이에 개신교 측 선제후들은 승인을 거부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리고 네덜란드에 망명 중이던 프리드리히 5세가 팔츠를 되찾기 위해 결성한 군대에 호응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의 동생이었던 크리스티안과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등이 군사를 일으켰다. 문제는 네덜란드에서 프리드리히 측 군대를 이끈 것이 '''에른스트 폰 만스펠트'''였다는 것이다. 여기저기 이력서를 돌리며 새 고용주를 찾고 있던 만스펠트는 모두 퇴짜를 맞고 자금난에 허덕였다. 여기에 새로이 잉글랜드와 네덜란드의 지원을 얻게 되면서 여유가 생기고 막시밀리안 1세에게 눈 뜨고 선제후 자리를 뺏기기 직전이었던 [[프리드리히 5세]]는 즉시 전력감을 찾고 있었다. 이에 부합했던 게 만스펠트의 용병대였다. 급하게 선금을 치르며 만스펠트를 영입하는 데까지는 성공했는데 문제는 일단 숫자는 얼추 제국군과 대등해졌지만 따로따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만스펠트가 팔츠 회복을 위해 알자스로 진군을 시작하고 크리스티안과 바덴두를라흐 변경백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를 가만히 보고 있을리 없는 제국군도 먼저 틸리를 통해 바덴두를라흐 [[변경백]]을 재기 불능의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크리스티안을 추격하는데 크리스티안은 군자금을 벌기 위해 가톨릭 개신교 가리지 않고 도시들을 약탈하고 있었다. 어렵게 만스펠트와 크리스티안이 근접하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크리스티안이 틸리군에 따라잡혔다. 결국 도강 교두보에서 대포와 보급품을 포기했으나 대다수의 병력과 약탈한 물자를 보존한 채로 만스펠트와 합류했다. 젊고 자신만만한 크리스티안은 결전을 원했으나, 휘하 용병이 유일한 자산이었던 만스펠트는 동의하지 않았다. 결국 만스펠트는 [[프리드리히 5세]]와의 계약을 해지했으나, 일단은 연합해서 네덜란드를 공격 중이던 스페인군을 격파하고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그사이 틸리는 남부 독일을 정복했으며, 이에 힘입어 페르디난트는 독일과 보헤미아를 자신의 추종자를 중심으로 재편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는 국내외에 반발을 불러왔고 특히 할버슈타트 주교구는 분쟁의 중심에 있었다. 페르디난트는 자신의 막내아들인 레오폴트 빌헬름 대공 ^^(1614년 ~ 1662년)^^[* 초기에는 주교로 임명되었으며 나중에 독일 기사단의 단장이 되기도 했다. 30년 전쟁에서 야전 지휘관으로 활약했으며 전쟁이 끝나고 난 뒤에는 1647년부터 1656년까지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서 프랑스와 기나긴 전쟁을 벌였다. 이처럼 레오폴트 빌헬름은 오랜 기간 여러 전쟁터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정착된 삶을 살지 못했다.][* 여담이지만 이 양반은 시대를 앞서간 예술 마니아로 미술에 매우 관심이 많아 예술 작품을 수집하였는데 그것이 1,000점에 이르렀다고 한다.]을 이곳의 대주교로 임명하고자 했으나, 크리스티안이 이곳을 점령하고는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의 막내아들 울리크 왕자를 대주교로 선언하고는, 도시를 내버리고 네덜란드로 후퇴해버렸다. 이로인해 크리스티안은 '''할버슈타트의 광인'''이라는 악명을 얻었다. 그는 만스펠트와 네델란드의 오라녜공과의 연합을 구상한 듯 하나, 만스펠트는 여전히 전투를 거부했고, 약탈품으로 기동이 느려진 크리스티안의 부대는 네덜란드에 도달하기 직전에 틸리의 군대에게 덜미를 잡혀 1623년 8월 8일 슈타트론 전투에서 괴멸당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